역사적 배경과 의의
교남YMCA와 3.1운동
교남YMCA 독립유공자
교남YMCA 임원명단
교남YMCA 주요활동

교남YMCA 연도별 주요 활동

교남YMCA 연도별 주요 활동

year_1914

– 대구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 청년전도를 위해서 남성정교회(현.제일교회 구예배당) 길 건너편에 YMCA건물을 지었고, 방혜법 선교사(H.E.Blair)가 이 건물의 공사를 감독하였음

 

year_1915

– 이만집, 김태련, 최종철, 박영조, 이희봉, 백남채, 최경학, 정광순, 김만성 등은 교남YMCA 건물 안에서 교남기독교청년회(嶠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함.

– 대구 영남지역의 성서공회라 할 수 있는 경북서원이 1층에 자리 잡아서 기독교문서 보급운동의 중심지역할을 수행하였으며, 3대 YMCA협동총무로 시무하셨던 방혜법 선교사(H.E.Blair)는 이 곳에서 11명의 권서들과 함께 성서보급운동 및 전도활동을 총괄하였음

 

year_1917

– 대구 최초의 서양식 결혼예식 거행됨(교남YMCA 초기임원 최경학)

 

year_1919

– 교남YMCA 주요지도자들은 3.1만세운동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교남YMCA 초대회장 이만집 목사, 김태련 총무, 백남채, 김영서, 부회장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발기이사 12명 중 7명은 일제총독부로부터 최고의 중형을 선고받음. (재판결과는 이만집 목사 3년, 김태련 총무 2년6개월, 백남채, 김영서 초대발기이사 각 2년, 부회장 정광순, 권희윤 1년 6개월, 이재인 1년) 이후 이들 7인 모두가 국민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음

– 3.1만세운동에 父子로 참여한 이는 총4父子인데 이 중 3父子가 당시 교남YMCA임원이었으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김태련 초대총무의 아들 김용해 군은 심한 고문 끝에 치명상을 입어 가출옥된지 2-3일이 못되어 운명하였고, 장례식이 교남YMCA장으로 거행되었음

 

year_1921

– 교남기독교청년회 청년을 분발을 촉구하는 창립발회식 개최

 

year_1922

– 도청으로부터 “사립 대구법률강습소”로 정식인가를 받아 대구 최초 사립법률강습소 운영

– 민중의식개발을 위한 대강연회 개최

– 기독청년대운동회 개최(장소:달성공원, 참가인원2000명)

 

year_1923

–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자본에 의해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가는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조선물산장려운동 전개(동아일보 1923.2.18. 단연금주 토산품장려선전 연합연설대회)

 

year_1926

– 농촌지도자를 위한 농사강습회를 실시하고 대구지역 농촌계몽운동과 농민의 자조적인 협동조합운동의 전진기지 역할 수행

– 대구화가 박명조의 개인미술전시회가 교남기독교청년회관 2층에서 개최됨(대구 최초)

 

year_1927

– 조선인 착취 기관의 철폐, 이민정책 반대운동, 타협적 정치운동 배제 등을 외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신간회운동에도 교남YMCA 3대 이사장 곽진영(당시 중외일보 지부장, 남성정교회 : 현 제일교회 장로) 등이 준비위원 및 재무간사로 참여함

 

year_1930

– YMCA창립 15주년 기념식 개최

– 소년 척후대 조직 및 지도자 강습회 개최

 

year_1931

– 1월 지역교회와 함께 약령시(藥令市) 전도대강연회 개최

– 농촌부흥을 위한 농촌강좌 개최를 통한 농촌계몽운동 및 협동소비조합운동의 전진기지 역할 수행

 

year_1938

– 2월 14일 조선약업주식회사에 매매

 

year_1955

– 한국흥업은행 경매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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