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배경과 의의
교남YMCA와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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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3.1만세운동 지도자들의 성장과 회합의 공간

대구3.1만세운동 지도자들의 성장과 회합의 공간
대구3.1만세운동 지도자들의 성장과 회합의 공간
대구3.1만세운동 지도자들의 성장과 회합의 공간

위의 YMCA의 설립목적은 그 본래의 취지를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거대한 역사적 흐름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대구3.1만세운동이다.

대구만세운동의 제안자로 알려진 이갑성은 대구출신으로 브루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어 유교집안과의 갈등으로 서울로 유학하게 된 성장배경 때문에 영남지역만세운동의 연락책을 담당하고,만세운동 과정에서 학생들의 동지적 단결과 주도세력형성에 주로 관여한 33인대표 중 1인이다.1)

이갑성이 2월 22일 대구의 3.1만세운동을 조직하기 위하여 대구에 내려와 만난 2명의 인물이 바로 교남YMCA의 주창자이자 발기이사인 브루언2) 선교사와 교남Y의 초대회장이자 전직 계성교감출신의 이만집 목사(남성정:현 제일)이었다. 브루언 선교사와 이만집 회장에 대한 1차 설득은 결렬되었으나 3.1서울만세운동 이후 이만집 회장의 결단으로 3월 8일에 제일, 신정(현 서문, 제이교회), 남산을 중심으로 한 대구지역 교회, 신명, 계성, 성경고등학교, 대구고보 등을 중심으로 한 학생 청년들을 중심으로 대구3.8만세운동이 전개된다.

당시 일제하 대구지역사회에서 교회와 학생,청년들을 아우르고 1주일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대규모 만세운동의 조직과 동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조직적 연결망은 교남Y가 거의 유일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사실은 3.8운동만세운동 이후에 나타난 사회적 결과를 분석해보더라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3.8 대구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총독부의 재판 결과를 보면 교남Y 초대 회장 이만집목사 최고형 3년, 초대 총무 김태련 2년 6개월, 초대 발기이사 백남채, 김영서 각 2년, 부회장 정광순, 권희윤 1년 6개월, 이재인 1년 등 발기이사 9명 중 7명이 최고의 중형을 선고 받아 일제가 이 만세운동의 지도부로 교남Y의 초대 임원들을 지목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중 교남Y를 중심으로 활동하셨던 지도자들 중 총 17명이 3.1운동과 관련하여 국민훈장 애국장(3명), 애족장(14명)을 수훈한 기록(자료별첨)에서 보여지듯 교남YMCA야 말로 3.1만세운동의 기독교 민족 지도자들의 본산이라 할 것이다.

이들 중에는 경주의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옥고를 치루고 남산교회로 오신 박영조 종교부장(초대경북노회장),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룬 후 교남Y로 온 신흥무관학교 출신 배승환 주임간사,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대표 위원을 지냈던 백남규 소년부 간사 등 국내외를 넘나들며 활동했던 민족운동가 등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운동의 최대 주동자 중 1인인 김태련 교남Y 초대총무의 아들이자 대구만세운동의 최초 순교자인 김용해 군의 장례식이 교남Y(기청)회관에서 거행되었고3), 만세운동 이후에도 교남Y는 조만식 평양Y총무 등과 함께 전개한 1920년 이후의 물산장려운동4)과 기독교농촌운동5), 신간회운동6)일제강점하 전체를 관통하는 폭넓은 기독교민족운동의 활동거점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제일교회 임시 예배당, 대구 영남지역의 성서공회라 할 수 있는 경북서원이 1층에 자리잡아서 기독교 문서 보급 및 전도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7)하였으며 최초의 외국어어학강좌, 생활법률강좌, 근대미술전, 서양식 결혼식 등이 진행되어 교회사적으로나 일반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 장소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37년, 보다 넓은 회관으로의 이전을 목표로 건물을 매각하여 신명여고 옆 기독빌딩을 매입하려고 하였으나, 일제 말 탄압과 신사참배거부로 인한 선교본부 추방으로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8). 이 매각자금은 해방 이후 대구고등성경학교(현재의 영남신학교) 설립비용으로 쓰여9) 지역사회 기독청년을 육성하고자하는 이 지역 기독인들의 염원사업에 사용되었으니 그 탄생과 마지막까지 이 건물의 최초 설립목적을 이루어 나갔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역사라 할 것이다.

1) 연동교회 애국지사 16인열전,2009.10.10

2) 당시 계성의 대 교장이면서 신명여학교의 설립자 부마태선교사의 부군임

3) 3.1만세운동에 부자(父子)로 참가한 이는 총 4父子인데 이중 3父子가 당시 교남YMCA의 임원이었으며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김태련 초대총무의 아들 김용해씨는 헌병에게 잡혀가 고문후 가석방되어 29일 소천하시어 그 장례식이 교남YMCA장으로 거행되었음

4) 단연금주 토산장려선전 연합연설대회 1923.2.18 동아일보 참조

5) 일제하 한국기독교농촌운동 1925~1937. 著者 한규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6) 본회 3대 이사장 곽진영(당시 중외일보 지부장,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장로)등이 준비위원 및 재무간사로 참석

7) 1908년 서울YMCA 1층에 대한성서공회 최초로 조직 설립됨. -대한성서공회 100년사. YMCA협동총무 및 총무로도 시무하셨던 방혜법선교사는 경북서원에서 11명의 권서들과 함께 성서보급운동을 총괄하였음

8) 대구YMCA80년사

9) 제일교회 110년사,244P